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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안동군 도산면(陶山面) 분천동(汾川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A01+KSM-XD.1913.4717-20090831.T47172001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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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토지대장
내용분류: 경제-농/수산업-토지대장
작성주체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913
형태사항 크기: 27 X 19.5
장정: 합철
수량: 30장
판식: 半葉匡郭, 有界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일본어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군청 / 경상북도 안동시 명륜동
현소장처: 안동시청 / 경상북도 안동시 명륜동

안내정보

1913년 안동군 도산면(陶山面) 분천동(汾川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汾川洞은 조선후기(1789년) 이래 예안현 혹은 禮安郡宜東面에 속하였는데, 부내, 또는 汾川, 汾江村이라고도 하였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원래의 분천동 일부만으로 안동군陶山面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73년에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현재 송티넘티 등 2개의 마을만 남아 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분천동고려말엽에 軍器寺少尹을 지낸 永川人 李軒이 고향 영천을 떠나 이곳에 옮겨와 산 이후로 그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聾巖 李賢輔(1467-1555)의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앞에는 汾江이 흐른다. 청량산으로부터 도산서원 앞을 거쳐 부내의 외곽으로 굽이쳐 흐르는 물을 낙강이라 하는데, 옛날 汾江村 앞에서 강물이 두 줄기로 갈라졌으므로 汾江, 分水, 分川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1913년 현재 분천동에는 모두 7개 성씨로 李氏, 金氏, 卞氏, 申氏, 張氏, 池氏, 洪氏 등 적어도 7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이씨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이들 대부분은 永川李氏이다. 따라서 분천동은 영천이씨의 동성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남기현, 『史林』 32, 수선사학회, 2009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
정진영

상세정보

1913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慶北安東郡陶山面汾川洞의 田畓과 垈地, 林野, 墳墓地 등의 소유자로부터 신고서를 제출받아 작성한 토지 장부
安東郡陶山面汾川洞土地調査簿
자료의 내용
1913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慶北安東郡陶山面汾川洞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3년 7월 10일 일괄적으로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安東郡陶山面汾川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분천동의 토지는 모두 324필지 210,319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197필지 146,249평, 畓은 105필지 49,611평, 垈는 36필지 7,149평, 林野는 3필지 6,824평, 墳墓地는 1필지 486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는 1.7배, 면적에 있어서는 2.9배나 많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아주 혼란스럽다. 그것은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면․동체제에 따라 기재되어 있다. 즉, 옛 禮安郡이나 안동군北先面, 東先面, 臨南面, 西先面 등은 1914년 통폐합되어 그 명칭이 소멸되어 버렸지만, 주소란에는 여전히 소멸된 군․면․동의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면․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면․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國有地는 전 4필지 2,734평, 답 1필지 554평, 대지 1필지 91평이고, 나머지는 모두 民有地이다. 분천동의 민유지 총 소유자는 65명이다. 그리고 이들 65명 가운데, 분천동을 주소한 소유자는 39명, 분천동 이외의 소유자는 26명이다. 분천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7개 성씨로 李氏 32명, 金氏 2명, 卞氏·申氏·張氏·池氏·洪氏 각 1명 등이다. 분천동 소유자의 토지는 전 130필지 103,934평(72.6/71.1%), 답 78필지 34,826평(74.3/70.2%), 대지 24필지 4,934평(66.7/69.0%), 임야 2필지 4,086평(66.7/59.9%), 분묘지 1필지 486평이다. 분천동 이외의 소유자 가운데 同面 거주자는 8명, 同郡(안동군, 예안군 포함) 거주자는 11명, 他郡民 7명(奉化 3, 英陽 3, 聞慶 1) 등으로 나타난다.
기타 및 특이사항
기타사항이나 특이사항은 전혀 없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안동군陶山面汾川洞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朝鮮總督府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郡․面․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남기현, 『史林』 32, 수선사학회, 2009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
정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