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백불암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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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주최씨 백불암종택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의 옻골마을에 위치하며,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1616년(광해군 8) 최동집(崔東㠍, 1586~1661)이 이곳에 정착한 뒤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경주최씨 동성마을을 이루었다. 옻골에 세거하여 옻골최씨라고도 한다.

세거 과정과 성장

경주최씨의 시조는 최치원이다. 옻골최씨 1세는 조선개국 공신 광정공(匡靖公) 단(鄲)이고, 그의 손자 맹연(孟淵)이 대구 입향조이다. 8세 계(誡)는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대구지역의 의병장으로 공을 세워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동집이 옻골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경주최씨가 옻골에 들어온 이후 가계는 동집→위남(衛南)→경함(慶涵)→수학(壽學)→정석(鼎錫)→흥원→주진(周鎭, 號: 東溪)→식(湜)→효술(孝述, 號: 止軒)→명덕(命德)→시교(峕敎, 號: 漆滸)로 이어진다.
옻골 입향조 최동집은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옻골최씨는 최동집의 6세 최흥원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한다. 최흥원은 학문에 힘써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고,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보고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참고하여 부인동규(夫仁洞規)를 만들었다. 이 규약을 통해 백성들에게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도록 가르쳤고,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의 창고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참봉, 교관, 장악원 주부, 세자익위사 좌익찬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이듬해 승지에 추증되었다.
최흥원의 아들 주진은 18세기 영남학파의 중심 인물인 대산 이상정의 문인이고, 증손자 효술은 이상정의 고제(高弟)인 입재 정종로의 외손이며 문인이다. 5대손 시교는 일제 때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대구지역 대표 가운데 한 명이다.
옻골최씨는 대구에 입향한 이후 대대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으며,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활동하였다. 옻골최씨는 향약을 실시하여 어려운 백성들을 구휼하는 등 배움을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소장 자료와 가치

경주최씨 백불암종택에서는 소장되어 오던 자료 2만 여건을 한국국학진흥원과 안동대 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이다. 한 문중에서 생산된 자료로서는 매우 방대한 분량으로, 이는 대대로 이어진 사환 및 적극적인 향촌 활동과 학문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상이 남긴 자료를 소중히 간직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기탁한 자료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간찰이다. 2014년 12월 안동대학 박물관에서는 백불암종택의 간찰 자료 전시회를 통해 백불암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 기탁 자료 가운데는 최흥원의 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18세기 영남 사족사회 및 퇴계학파의 생생한 모습을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