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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지(晉陽誌)』 수록 1603년 김대명(金大鳴) 동약발(洞約跋), 1611년 정승훈(鄭承勳) 동약서(洞約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C.1611.4817-20110630.Y11418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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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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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김대명, 정승훈
작성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작성시기 1611
형태사항 크기: 16.5 X 23
판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2권 2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진양지(晉陽誌)』 수록 1603년 김대명(金大鳴) 동약발(洞約跋), 1611년 정승훈(鄭承勳) 동약서(洞約序)
조선시대 경상도진주 지역의 읍지(邑誌)인 『진양지(晉陽誌)』 수록 발문(跋文)과 서문(序文)이다. 발문은 1603김대명(金大鳴)이, 서문은 1611정승훈(鄭承勳)이 각각 작성하였는데, 모두 진주백야동(白也洞) 일대에서 시행된 동약(洞約)의 발문과 서문이다. 동약은 몇 개의 마을 단위로 시행되던 향약(鄕約)으로 16세기 이후, 지역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시행이 확산되어 갔다. 백야동에서의 동약 역시, 16세기 중반부터 실시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었다. 본 발문과 서문은 임진왜란 이후 중지된 동약을 복구하고, 전란으로 소실된 약원(約員) 명부를 새롭게 만들면서 작성된 것이다. 김대명의 발문과 정승훈의 서문에는 이러한 동약의 실시 목적과 명분,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복구되는 과정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광우

상세정보

慶尙道晉州牧白也洞에서 실시되던 향약의 명부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跋文과 序文으로, 발문은 1603金大鳴이 작성하였고 서문은 1611鄭承勳이 작성
邑誌 晉州 上晉陽誌 卷之上 洞約序
[내용 및 특징]
16세기 이후 지방의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은 재지사족들은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고을 단위 또는 洞里 단위의 향약을 시행해 나갔다. 16세기 중반 이후 경상도진주에서도 각 동리별 향약 시행이 확산되는데, 白也洞에서 실시된 동약도 그 중 하나이다. 백야동은 지금의 慶尙南道晉州市寺奉面武村里中村 일대에 형성된 동리인데, 이곳의 향약은 임진왜란으로 約員 명부인 洞案이 소실되는 등 향촌피폐와 더불어 중단되었었다. 본 자료는 전란이 끝난 후 향촌 복구와 더불어 새롭게 작성된 것으로 진주의 邑誌인 『晉陽誌』에 수록되어 있다. 발문과 서문을 작성한 金大鳴鄭承勳백야동에 入鄕한 鄭淳의 內外 후손이다.
먼저 김대명 동약 발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마을의 오랜 이름은 晉州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적 外先祖 都染署令鄭淳 공께서 처음 이곳에 정착한 후 내외의 자손들이 여기에 거주하게 되었다. 지금 이 마을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로 선조의 유풍을 실추시키지 않으며, 수백 년간 이어 오고 있다. 密陽府使姜應台가 洞憲을 짓고, 宗簿僉正鄭密 공이 그 족보를 敍하였으며, 進士 鄭安 공이 이를 이어 跋文을 쓰고 아울러 洞案을 修成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여러 궤에 보관해 왔다. 歲時와 伏臘 때에는 각기 닭과 술을 준비하여 신의를 다짐하고 화목을 닦았으며, 해마다 이를 常禮로 하였다. 불행히 병화가 매우 심하여 姜, 鄭 두 선생이 손수 쓰신 洞文이 모두 불타 재가 되었으니,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 다행히 우리들이 凶鋒을 피하고 목숨을 보존하게 되어, 지금에 술잔을 서로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니 불행 중 큰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동안에 차례대로 써서 옛 규약을 복구한다. 萬曆 31년 癸酉(1603) 灯夕에 奉正大夫 行 鳳山郡守金大鳴이 삼가 跋한다.
김대명의 발문은 그의 문집인 『白巖集』에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적어도 16세기 중반 이후 백야동 일대에서 동약이 시행되었다는 것이며, 鄭淳의 내외 후손들이 동약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전란 후 동약의 동안이 복구된 것은 어수선해진 향촌 내 질서를 종전과 같은 체제로 복구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어 정승훈이 작성한 서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呂氏鄕約을 살펴보니 효도와 우애, 화목, 힘써 구휼하는 뜻이 있고, 환란과 길흉이 있을 때 서로 구제하는 도리가 있었다.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뜻이다. 비록 鄕黨과 이웃 마을에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화목을 닦아 힘써야 할 것이니, 하물며 우리 한 동네 사람으로 곧 한분의 후손에 있어서이겠는가? 한 분의 후예로 한 동네 안에 산다고 하면 그 정은 더욱 친하고, 그 宜는 더욱 무거운 것이다. 비록 內外와 遠近이 같지 아니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인 것이니, 同祖의 뜻을 생각하여 화목을 돈독히 하는 마음으로 힘쓴다면 어찌 한 동네에 사는 것이 아름다운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 선조 都染公께서는 처음으로 여기에 터를 잡으셨으니 내외의 자손이 수백으로 불게 되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 가장 많은 것이 鄭氏이며, 孫, 金, 姜은 모두 그 외손으로 모두 詩와 書를 業으로 삼으니 忠孝를 숭상하게 되어 간혹 文人과 才子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府使姜公은 훌륭한 재질이 淸顯에 뛰어났고 輿望이 當世에 무거웠으며, 翰林으로서 그 효성이 파다하였는데, 裵洛川은 그를 세상에 숨겨진 어진 사람이라 이르렀다. 그 뒤로 우리 先公 僉正府君께서 이어 龍榜에 급제하였으며, 郡守金公大鳴이 庚午年(1570) 文科에 第一로 급제하였고, 季叔父 께서도 또 경오년 進士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밖에 나머지도 文墨에 종사하여 이름이 司馬에 참여한 이도 또한 많았으니, 어찌 우리 동네에서 詩를 돈독히 하고 禮를 가르친 효험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한 동네의 사람들이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系代가 멀어지고 派가 나눠지게 되었다. 각자 기약을 하였으나 더욱 소원해 지게 되었으니, 情이 소원해진다면 길거리의 남일 따름이다. 한 사람의 몸에서 비롯되었으나 마침내 길거리의 남이 되고 말았으니 가히 비통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 우리 洞員은 다행히 병화를 면하여 우리의 옛 터를 회복하고, 洞案을 만들었고 다시 洞規를 정하였으며 郡守金先生이 跋했으니, 혹자는 하늘이 이 동네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지금 선생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洞員 6,7명도 서로 이어서 작고하였으며,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동안을 두 번이나 개정하였으니 진실로 답답한 일이다. 오직 諸君에게 원하노니 한갓되게 손잡고 술잔을 기울이며 허튼 웃음으로 노는 것만 일삼지 말고, 父兄이라면 먼저 弟子를 가르침에 있어서 小學의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 하는 것’을 가르쳐서 根基로 삼을 것이다. 또 諸子百家의 글과 史書로써 立身揚名하는 바탕으로 삼는다면, 우리 동네의 인재가 옛날에도 부족한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에도 어찌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애석하다. 우리 후학들이 이를 힘써야 할 것이다. 아! 기쁠 때에 賀禮하고 슬플 때에 조문하던 것이 우리 선조의 厚意이다. 봄과 가을에 선조의 옛 규약을 講信하고, 선조의 厚意를 본떠서 선조의 옛 규약을 준수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순후한 의리가 아니겠는가? 疏遠한 사람을 볼 때에는 더욱 친근하게 하고, 낮은 사람을 대접할 때에는 높은 이를 모시듯이 하며, 情誼를 서로 바꾸어서 終始토록 변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써 諸君들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萬曆 39년 辛亥(1611) 4월 旣望(16일) 生員 鄭承勳.
정승훈의 서문은 김대명이 발문을 작성한지 8년 뒤에 만들어졌다. 그의 서문 역시 김대명의 것처럼 동약의 유래와 복구 과정 및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임진왜란 이후 동약이 복구되고, 다시 정승훈이 서문을 작성하기까지 두 차례나 동안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동안은 동약의 약원 명부로 입록자의 성격은 곧 동약 주도세력의 추이를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정승훈의 서문대로 1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두 차례나 동안이 새롭게 마련되었다는 것은 향촌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음을 추측 할 수 있다. 백야동에 정착한 가문이 鄭淳의 내외손으로, 여러 가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들 간 향촌 주도권 경쟁이 야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후 경상도진주 지역 재지사족들의 향촌 운영과 향약의 실시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임진왜란 직후 재지사족들은 피폐해진 향촌 복구에 주력하는 동시에, 전란으로 중지된 향약을 새롭게 마련해 나갔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야동도 舊來의 사족들에 의해 복구되었고, 새롭게 동안을 작성하는 등 동약이 다시 제정되었다. 전란으로 어수선해진 향촌질서를 동약의 시행으로, 종전과 같이 사족중심의 질서 체제로 환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야동에서의 동약은 복구 후에도 참여 사족들 간의 주도권 경쟁으로 동안이 두 차례나 새롭게 작성되는 등 원활한 운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동약이 鄭氏, 孫氏, 金氏, 姜氏 등 여러 가문에 의해 결성된 만큼, 동약 운영을 둘러싼 가문 간 갈등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향약 운영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은 가문 간, 신분 간, 당색 간의 複雜多技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白巖集』, 金大鳴,
『晉陽誌』,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晉陽郡史』, 晉陽郡史編纂委員會, 晉陽郡, 1991
『17~18세기 南冥學의 繼承과 發展』, 金俊亨,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南冥學硏究院, 2008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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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진양지(晉陽誌)』 수록 1603년 김대명(金大鳴) 동약발(洞約跋), 1611년 정승훈(鄭承勳) 동약서(洞約序)
洞約序【吾洞久名於矣昔先祖都柒署
鄭公淳始居焉今之居此洞者

【皆其後也不墜先世遺風將數百年于玆
密陽府使姜應台作洞憲宗簿僉正

公密修族譜又爲序進士鄭公安繼爲修
成洞案藏諸柒樻歲時伏臈各佩鷄酒講

【信春秋歲以爲常不幸遘亂兵火甚酷姜
鄭兩先生手製洞文盡爲灰燼嗚呼痛哉

【何幸吾儕得避兇鋒以保今日把酒相話
此不幸中一大幸也列書洞案以復舊規

【焉萬曆三十一年癸卯灯夕鳳山郡守
大鳴謹䟦〇謹按呂氏鄕約有孝友睦婣

【任恤之義有患難吉凶相救之道皆所以
明倫厚俗之義雖在鄕黨隣里尙此修睦

【況我一洞之員即一人之後也以一人之
後居一洞之內則其情親共義重矣雖有

【內外遠近之不同而源其本則同一祖也
思其同祖之義而務敦和睦之心豈非居

【洞之義意乎惟我先祖都柒公始卜築于
此內外子孫其麗數百而居此洞者尤多

【鄭姓孫金與姜外孫皆業以詩書尙爲忠
孝故文人才子亦或間出府使蜚英淸

【顯望重當世翰林孝誠己播裴洛川之文
則可謂間世之賢矣厥後我先公僉正府

繼登龍榜郡守金公大鳴庚午文科
第一季叔父又叅庚午進士魁其餘從

【事文墨名添司馬者亦多有焉豈非吾洞
敦詩說禮之收效乎嗚呼一洞之人同出

【於一源而系遠派分自期而至緦緦盡而
情踈則塗人也其勅一人之身而終至於

【塗人可悲也夫今我洞員幸免兵火復我
舊址旣寫洞案更定洞規而郡守金先生

【又爲之䟦或者天未欲喪此洞也不幸今
者先生旣歿而洞員六七相繼作故未逾

【十年案改至再良可於邑惟願諸君不徒
以握手啣杯酒浪笑傲爲事而爲父兄則

【先敎子弟以小學使知入孝出悌定立根
基又敎以詩書子史以爲立揚之資則我

【洞人才昔非不足今何獨也嗟我後學勉
之之之嘻喜賀悲吊先祖之厚意也講信

【春秋先祖之舊規也軆先祖之厚意遵先
祖之舊規者豈非惇厚之義乎視踈益親

【待卑愈尊情意相孚終始不咎深有望於
吾洞諸君子萬曆三十九年歲在辛亥四

【月旣望生
鄭承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