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2월 17일 李岱榮이 옥천 趙德鄰의 焚黃에 가지 못하는 마음을 한양조씨 玉川 문중에 전하는 편지
1900년, 2월 17일 李岱榮이 옥천 趙德鄰의 焚黃에 가지 못하는 마음을 한양조씨 玉川 문중에 전하는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간략하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편지를 쓰는 목적에 대해 "斯文이 陽復하여 先 선생에게 직첩을 주라는 명이 내려왔으니, 무릇 선비들 중에 누가 기뻐하며 박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追孝하시는 처지에 더욱 어떠하시겠습니까."라고 밝히며 상대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또한 분황의 예에 꼭 가야만 하지만 가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길복이 잘 이르러 焚黃의 예를 봉행하시는 이러한 때에 여러분의 생활이 더욱 신의 도움에 상응하시니 위로와 축하를 드리며 멀리서 미천한 정성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10세의 강송하는 정의로, 마땅히 찾아뵙는 날에 가야하나 지난번에는 이미 행하지 못했고, 이번에 함께 모여 경하하는 자리에도 가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이렇게 병고가 한꺼번에 밀어닥치니 바깥 예를 닦을 겨를이 없습니다. 이에 거듭 逋慢(이르지 못함)을 면할 수 없으니 저의 지극한 한스러움을 어찌 우러러 용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지극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며, 겨우 "密庵所에서 돈 2냥을 올립니다."는 정성을 표하고 있다.
발신자 李岱榮의 사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신축년(1901) 11월 1일에서 12월 22일까지 도산서원 상덕사에 모셔진 퇴계선생의 위판을 도둑맞은 일에 대한 顚末을 기록한 『陶山書院廟變時日記』 12월 16일 부조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日直 李岱榮 琦榮聯札, 宻庵所扶助三两."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李岱榮은 일직에 살았고 그의 아우는 琦榮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의 경자년은 1900년임을 알 수 있다.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에 따르면 을미년(1895) 2월15일에 쓴 편지에 "武陵所에서 두 냥을 바친다"는 정보를 보건대, 여기의 密庵所 역시 문집을 간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장소로 보인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박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