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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정건모(鄭建模)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F.1926.4776-20170630.03722570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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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정건모, 조○○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작성시기 1926
형태사항 크기: 19.7 X 42.7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26년 정건모(鄭建模) 서간(書簡)
1926년 1월 16일에 정건모가 형제의 大祥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형제의 대상을 맞이한 상대방을 위로한 뒤 조카와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평소의 정분을 저버리고 조문하지 못한 일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과 아이들이 이번 제사에도 갈 수 없어 조카를 대신 보낸다고 하면서, 제사를 잘 지내고 강녕하기를 기원하였다.
1차 작성자 : 서진영

상세정보

1926년 1월 16일, 鄭建模가 형제의 大祥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편지
1926년 1월 16일에 鄭建模(1866~1935)가 형제의 大祥을 위로하기 위해 注谷의 漢陽趙氏 측에 보낸 편지이다.
편지 내용으로는 먼저, 형제의 大祥을 맞이하여 슬픈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 상대방을 위로하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일상생활에 해를 입는 데에 이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어서 상대방의 조카와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슬프고 그리운 마음을 전했다. 자신은 평소에 상대방 집안과의 정분이 두텁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그것을 저버렸다고 하면서, 仲氏兄이 고향에 돌아온 뒤에 늘그막에 함께 하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마땅히 달려가 벗을 잃은 슬픔을 쏟아내야 했지만 자신도 몇 년 전부터 거듭 상을 만나 조문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겨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기를 앓아 갈 수 없고 아이들도 갈 수 없어서 자신의 마음을 엮어 조카(述模의 아들인 輝喆)를 보내 대신 영궤 앞에 고하니, 감히 용서를 바랄 수 없다고 하였다. 편지 말미에는 제사를 잘 지내기를 바라고 상대방의 강녕을 기원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이 편지의 발급자인 정건모는 본관은 東萊, 자는 可範, 호는 匏山이다. 父는 翼煥이며, 英陽 蓮塘에 거주하였다.
정건모는 편지 끝에 스스로를 ‘戚弟’라고 칭했는데, 그가 한양조씨 彦謙의 딸과 혼인하여 상대방과는 서로 인척 관계에 있으며 비슷한 연배이기 때문이다. 또한 편지 내용 중에 大祥의 당사자인 고인을 ‘仲氏兄’이라 칭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고인은 상대방에게는 둘째형이자 자신에게는 비슷한 연배의 인물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벗을 잃은 상황을 의미하는 ‘寢門[師吾哭諸寢 朋友吾哭諸寢門之外]’과 ‘喪質[自夫子之死也 吾無以爲質矣]’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두 사람이 서로 벗이었음을 알 수 있다.
1차 작성자 : 서진영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26년 정건모(鄭建模) 서간(書簡)

趙生員 靜座 執事。
狀上。
省式。仁家不幸。大被遽空。流光如駛。
儀床將撤。伏惟
兄超倫之篤友。何以堪痛悼之情
乎。更乞萬加
寬抑。無至損傷於
衰境興寢。如何。哀咸支嗇。芘
節俱淸淨。無或有碍於來日
將事節次否。區區悲漽。建模。自
謂平日情契無右尊門。近來負
逋。不可枚擧。且
仲氏兄還故後。竊幸有相將於白
首之日。而俄然之頃。遽隔明幽。當趁
趨寢門。以洩古人喪質之悲。而年
來疊遭喪慽。仰俯叫苦。實無弔
人之暇。今則非抽身無暇。而適病寒感。
無以遂意也。且豚等。各有拘掣。無以
替之也。略綴私臆。使阿姪替告
靈几前。禮闕情劇。不敢望
恕也。北首於悒。只祝
祀事利行。兄體康謐。不備。伏惟
兄照。
丙寅元月十六日。戚弟 鄭建模 拜。